본문 바로가기

장례 문화

재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 – 말레이시아 오랑 아슬리 부족의 비화장 장례

죽음을 맞이한 뒤 육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인류 문화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많은 지역에서 "화장(火葬)" 은 빠르고 위생적이며 자연 친화적인 장례 방식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원주민인 오랑 아슬리(Orang Asli) 부족은 오랜 세월 동안 화장을 철저히 배제한 비화장 장례 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이들은 죽은 자의 시신을 절대로 불에 태우지 않으며, 땅과 숲, 자연의 품 안에 그대로 맡긴다.

오랑 아슬리는 말레이 반도에 거주하는 18개 이상의 소수 부족들의 총칭으로, 이들은 자연과 깊이 연결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장례 방식 역시 자연과의 조화, 영혼의 순환, 조상 숭배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물이다. 이 글에서는 오랑 아슬리 부족이 왜 화장을 거부하고, 어떤 철학과 의식으로 장례를 진행하는지를 살펴보고, 현대화의 흐름 속에서 그 전통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를 조명해 본다.

재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 – 말레이시아 오랑 아슬리 부족의 비화장 장례

1 .  화장을 거부하는 이유: 자연과의 정령 신앙

오랑 아슬리 부족이 화장을 거부하는 이유는 단순한 문화적 선택이 아니라 깊은 신앙 체계에 기반한다. 이들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바위, 나무, 강, 바람—에 정령(Spirit)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Animism) 전통을 지닌다. 인간의 몸 역시 자연에서 왔기 때문에, 죽은 뒤에는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야 한다는 순환 철학이 장례 방식에 투영된다.

불로 시신을 태우는 행위는 오랑 아슬리에게 있어 육체의 파괴이자 영혼의 평안을 방해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이들은 불이 정령들을 자극하거나 분노케 할 수 있으며, 영혼이 온전히 떠나지 못하고 이승에 남아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따라서 화장은 금기이며, 영혼을 자연스럽게 떠나보내기 위해서라도 시신을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하려 한다.

이와 같은 믿음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죽음과 삶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는 원시적이고도 철학적인 세계관의 발현이라 볼 수 있다. 즉, 화장을 거부하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공경의 방식이자, 자연에 대한 신뢰와 순응의 표현이다.

 

 

 2 .  비화장 장례의 실제 절차와 의식 구조

오랑 아슬리의 장례는 대개 사망 후 빠르게 이루어진다. 이는 영혼이 방황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영적 균형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시신은 깨끗한 물로 닦고, 천이나 나뭇잎, 껍질 등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정갈하게 감싼 뒤, 공동체가 마련한 숲 속의 장례터에 매장된다.

이때의 매장 방식은 일반적인 관 매장과는 다르다. 시신은 나무로 만든 간단한 관이나 때로는 관 없이, 수평으로 눕히거나 웅크린 태아의 자세로 묻히며, 이는 삶의 시작으로 돌아가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매장 후에는 큰 돌이나 나뭇가지로 무덤을 덮고, 향초나 소박한 제물을 바쳐 영혼의 안식을 기원한다.

또한 장례식 동안에는 전통 악기 연주와 함께 영혼을 부르는 노래가 불려지는데, 이는 단지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평온히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의식이다. 일부 부족에서는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물건을 함께 묻는 부장(副葬) 문화도 존재하며, 이는 영혼이 외롭지 않게 떠나도록 돕는 행위로 여겨진다.

 

 

3 . 자연 속에서 이어지는 영혼과의 공존

오랑 아슬리 부족은 죽은 자의 시신을 자연에 맡기지만, 그 영혼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혼이 숲 속 어딘가에서 정령의 모습으로 존재하며, 후손을 지켜보는 존재가 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후관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며, 공동체 안에서 조상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적 감각을 가능하게 한다.

장례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가족은 묘지를 다시 찾아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영혼에게 소식을 전하는 의식을 반복한다. 이는 고인을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정령으로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행동이다. 또한 숲 속에서 특정 나무나 돌에 ‘기운이 느껴진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조상의 영혼이 머무는 자리라 하여 제단이나 표식을 남기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미신이나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그리고 조상이 맺는 유기적인 관계의 증거다. 숲은 단순한 장례 장소가 아니라,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며, 조상과 후손을 이어주는 영적 통로로 여겨진다.

 

 

 4. 현대화 속 비화장 전통의 지속 가능성과 도전

현대화와 개발의 물결은 오랑 아슬리의 전통 장례 문화에도 도전을 가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위생, 보건, 토지 관리 등의 이유로 일부 지역에서 비공식 매장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전통적인 비화장 장례 방식에 법적·물리적 제약을 가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도시화와 종교 개종의 영향으로 일부 오랑 아슬리 젊은 세대는 이슬람식 매장 혹은 기독교식 장례를 선택하기도 하며, 비화장 전통의 의미를 잊어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문화적 연속성에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러 공동체와 문화보호 단체는 전통 장례 방식의 복원과 보존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부 마을에서는 전통 장례 절차를 기록하고, 학교 교육에 포함시켜 다음 세대에 전수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정부와 협력해 공식적인 전통 장례 구역을 설정하고, 현대 보건 기준과 조화되는 방식으로 전통 매장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전통의 보존을 넘어,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현대사회에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결론 : 불을 거부한 장례, 자연으로의 진정한 귀환

오랑 아슬리 부족의 비화장 장례는 단순히 불을 사용하지 않는 장례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 인간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순환적 삶의 철학, 그리고 조상과 정령을 함께 모시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신념이 응축된 삶의 방식이다. 불에 태우지 않고, 흙에 맡기며, 숲 속에 조용히 잠들게 하는 그들의 장례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현대의 효율성과 위생 중심 장례 문화 속에서, 오랑 아슬리의 비화장 장례는 불편함 대신 존중과 신성함, 그리고 기억의 지속성을 추구한다. 그들이 선택한 장례의 방식은,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문화적 거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