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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문화

생전에 망자를 위한 관을 준비하는 전통 – 필리핀 부기족의 ‘살아있는 장례’

죽음은 대개 예기치 않게 찾아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미루기 마련이다. 그러나 필리핀 루손 섬 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부기족(Bugkalot 또는 Bontoc, Ifugao 포함)은 다르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관을 직접 준비하고, 때로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장례 의식을 미리 치르는 전통을 이어왔다.
이러한 ‘살아있는 장례’ 문화는 죽음을 불길하게 여기기보다는, 삶의 자연스러운 연속이자 가족과 공동체를 위한 마지막 선물로 여기는 부기족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부기족의 ‘살아있는 장례’는 단순히 관을 만드는 물리적 행위가 아니다. 이는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받아들이며, 삶과 이별을 온전히 의식하는 영적 성숙의 과정이다.
이 글에서는 부기족이 왜 생전에 관을 준비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배경, 구체적인 관 제작 및 장례 준비 절차, 살아 있는 자와 죽음의 공존 방식, 그리고 현대화 속 전통의 변화와 계승 시도까지 네 문단에 걸쳐 깊이 있게 살펴본다.

 

생전에 망자를 위한 관을 준비하는 전통 – 필리핀 부기족의 ‘살아있는 장례’

 

1 .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준비의 대상: 부기족의 장례 철학

부기족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고 마주해야 하는 필연적 사건이다.
살아 있는 동안 관을 준비하는 것은 죽음을 부르는 징조가 아니라, 오히려 삶을 마무리하고 가족을 보호하는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특히 부기족 사회에서는 나이가 들고 병약해지면, 스스로 자신의 관을 제작하거나 주문하며, 이 관은 집 안의 한 켠에 보관된다. 이는 관이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정면으로 수용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현으로 존중된다.

또한, 생전에 장례 준비를 마치는 것은 가족에게 경제적, 정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고인이 될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가족들과 함께 장례 방식, 제례 의식, 장례식 때 필요한 준비물까지 결정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죽음을 둘러싼 불확실성과 혼란을 줄이고, 평화롭게 삶을 정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부기족의 이러한 죽음 인식은 현대사회가 죽음을 외면하거나 두려워하는 태도와 크게 대비되며,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철학적 이해를 보여준다.

 

 

2 . 살아 있을 때 준비하는 관과 장례 절차

부기족의 전통에서는 관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통과 의례다. 보통 노인이 되면, 주변 가족과 함께 적절한 나무를 고르고, 직접 관을 깎거나 마을 목수를 고용해 관을 만든다.
관은 대부분 단단한 목재(주로 나랑카, 마호가니 등)로 제작되며, 크기는 몸에 딱 맞게 조정된다. 관을 준비한 뒤에는 관 안에 들어가 보며, "이곳이 내 마지막 집이구나"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준비할 수 있는 현실적인 사건으로 재해석된다.

관이 완성되면, 일부 부기족 공동체에서는 ‘살아있는 장례 의식’을 치른다. 이는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이 아니라, 곧 다가올 이별을 미리 기념하고 축복하는 가족 행사다.
노인은 관 옆에 앉거나 누워서, 가족과 친지들이 준비한 음식과 음료를 함께 나누고, 축복의 노래와 기도를 들으며 살아 있을 때 마지막 파티를 즐긴다.

이 행사는 슬픔보다는 감사와 축복의 분위기로 진행된다. 고인이 될 사람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가족들과 정을 나누고,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바람을 직접 전하며, 공동체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러한 절차는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마무리하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선택의 과정이다.

 

 

3 . 살아 있는 자와 죽음의 공존: 죽음을 일상에 들이다

부기족의 문화에서는 관을 만드는 것도, 그것을 집 안에 보관하는 것도 특별한 금기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관이 존재하는 일상은 가족 모두에게 죽음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삶의 일부가 된다.

관은 집 한 켠에 놓여 있지만, 그 주변에서 가족들은 평소처럼 생활하고, 아이들은 관을 장난스럽게 다루기도 하며, 특별한 경외심이나 공포를 갖지 않는다. 이는 죽음이 일상에서 배제되거나 숨겨져야 할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심리적 관용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문화는 가족 간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례 준비를 함께 함으로써, 고인이 될 사람과 가족 간의 미해결된 감정이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앞두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감사를 표현하며, 삶을 정리하는 과정은 가족 공동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든다.

이처럼 부기족은 죽음을 삶의 끝으로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 서로를 정의하고 완성하는 연속성의 일부로 인식하며, 일상 속에서 죽음을 수용하고 살아간다.

 

 

4 . 현대화 속 부기족 장례 문화의 변화와 계승

현대화, 종교 전파, 도시화는 필리핀의 부기족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많은 젊은 세대는 도시로 이주하며 전통적 장례 문화와 관습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으며, 기독교 장례식이나 현대식 매장 방식을 따르는 경우도 많아졌다.

또한 죽음과 관련된 전통을 미신이나 비효율적인 관습으로 보는 외부 시선도 존재하며, 일부 가족들은 생전에 관을 만드는 것을 꺼리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공동체, 특히 산악지대의 원주민 지역에서는 살아있는 장례 전통이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부기족 문화 보존 운동가들은 전통 장례 방식을 기록하고, 다큐멘터리 제작과 지역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전수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전통의 본질을 고수하되, 현대적 상황에 맞춰 상징적 관 제작이나 약식 장례 준비를 도입하는 등 유연한 방법으로 문화를 계승하고자 한다.

부기족의 살아 있는 장례 문화는 단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온전히 껴안고 준비하는 인간 본연의 지혜를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결론 : 죽음을 준비하며 삶을 완성하는 부기족의 지혜

필리핀 부기족의 ‘살아있는 장례’ 전통은 죽음을 외면하는 현대사회에 깊은 교훈을 준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연결고리이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기 위한 의식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관을 만들고, 살아 있는 동안 장례를 준비하는 부기족의 방식은, 두려움이나 불안이 아니라 감사와 사랑으로 이별을 준비하는 문화적 미학을 보여준다.
이들은 죽음조차 숨기지 않고,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인간다움과 공동체적 연대를 실천해온 것이다.
부기족의 지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죽음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과 용기를 선물하고 있다.